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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내가 김정은이었다면 축지법부터 버렸을 것이다 — 어쩌면 지금의 북한이 차라리 다행인 이유

보험 카르텔 파괴자 2026. 9. 29. 12:13

[상상 칼럼] 내가 김정은이었다면 축지법부터 버렸을 것이다 — 어쩌면 지금의 북한이 차라리 다행인 이유

가끔 북한의 선전물을 접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김정은이었다면 정말 저렇게 했을까?”

먼저 전제를 분명히 하자. 나는 북한의 독재체제를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김일성 일가의 우상화를 긍정하는 것도 아니다. 6·25전쟁의 남침이나 북한의 각종 도발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말 그대로 ‘내가 김정은이라는 독재자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선전 방식을 생각했을까?’라는 풍자적 사고실험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가장 먼저 축지법 같은 황당한 이야기부터 버렸을 것 같다.

왜냐하면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지도자를 초능력을 가진 존재처럼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그럴듯하게 들리는 우상화 방식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김정은이었다면 김일성을 ‘초능력을 가진 영웅’이 아니라 ‘한반도의 미래를 일찍부터 내다본 지도자’처럼 재포장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서운 것은 여기서부터다.

한국의 뉴스를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보여준다면?

내가 김정은이었다면 한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숨기려고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대규모 금융사기가 발생한다.

북한이 사건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한국 언론이 이미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력범죄가 발생한다.

그것 역시 한국 방송에 나온다.

산업재해가 발생하고 정치인의 비리가 터지고, 전세사기 피해자가 등장하고 취업난과 주거 문제가 사회적 논란이 된다.

기존의 낡은 북한식 선전이라면 무조건 “남조선은 생지옥”이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목소리를 낮추고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남쪽의 언론이 직접 보도한 내용입니다.”

황당한 거짓말 백 마디보다 이 한마디가 훨씬 상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사건 자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대한민국에서 하루 동안 일어나는 수많은 평범한 일상은 보여주지 않고 가장 충격적인 사건만 계속 골라 보여준다고 생각해보자.

하나하나는 모두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 반복해서 접한 사람의 머릿속에는 실제 대한민국 전체와 전혀 다른 대한민국이 만들어질 수 있다.

거짓말을 거의 하지 않고도 현실을 왜곡할 수 있는 것이다.

축지법 대신 ‘미래를 내다본 김일성’

여기에 기존의 우상화까지 현대적으로 바꾼다고 상상해보자.

축지법 같은 황당한 이야기는 줄인다.

대신 한국에서 사회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김일성의 과거 발언을 현재의 문제와 연결한다.

심지어 실제 발언의 맥락을 바꾸거나, 북한 내부에서 검증하기 어려운 표현을 덧붙이는 일까지 벌어질 수 있다.

그리고 방송에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수령님께서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이러한 사회가 찾아올 것을 내다보시었다.”

한국에서 금융사기가 터진다.

“수령님의 예견이 현실이 되었다.”

강력범죄가 발생한다.

“수령께서는 인간성이 파괴되는 사회의 미래를 이미 경고하셨다.”

저출산 문제가 터진다.

“수령께서는 자본이 인간보다 중요해지는 사회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 이미 내다보셨다.”

이런 식으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새로운 ‘예언 적중 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김일성 우상화의 캐릭터도 완전히 달라진다.

‘축지법을 사용하는 김일성’에서 ‘수십 년 뒤의 미래까지 내다본 김일성’로.

둘 다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신화라는 본질은 같다.

그러나 후자가 현대인에게 훨씬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이 무서운 부분이다.

심지어 남침에 대한 선전까지 바꾼다면?

여기서 더욱 극단적인 상상을 해봤다.

북한이 어느 날 6·25전쟁의 남침 자체를 부정하는 기존 방식을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먼저 남쪽으로 진격했다.”

처음 들으면 엄청난 역사적 태도 변화처럼 보일 것이다.

“북한이 드디어 역사를 인정하는 것인가?”

하지만 바로 다음 문장에서 의미를 완전히 뒤집는다.

“그러나 그것은 침략이 아니라 남쪽 인민에게 닥쳐올 이러한 미래를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에서 발생한 범죄와 각종 사회문제를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성립할 수 없다.

수십 년 뒤 발생한 사건이 1950년의 침공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현재의 사회문제로 과거의 침략전쟁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상식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프로파간다는 반드시 논리적으로 완벽해야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야기 구조를 반복적으로 주입하면 사실과 해석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다.

“남한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 때문에 발생했다.”

여기서부터 해석이 들어간다.

“김일성은 이런 미래를 예견했다.”

여기에서 우상화가 시작된다.

“따라서 당시의 행동은 남쪽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전혀 다른 정치적 결론이 만들어진다.

사실 → 선택적인 해석 → 우상화 → 역사 정당화.

사실에서 출발했지만 도착한 곳은 전혀 다른 곳인 것이다.

남한의 피해자에게 직접 마이크를 건넨다면?

그리고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봤다.

북한 방송에서 아예 한국 사람들의 피해 제보를 받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어떨까?

금융사기를 당한 사람, 산업재해 피해자, 범죄 피해자,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제보한다.

북한 아나운서가 만들어낸 가상의 피해자가 아니다.

실제 한국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피해를 이야기한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일방적인 선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가 된다.

북한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사회의 구성원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피해사례 자체가 사실이라면 한국에서 “북한이 만들어낸 거짓말이다”라고 반박하기도 어려워진다.

그리고 방송의 마지막에서 정치적 해석을 덧붙인다.

한국인의 실제 피해 경험과 북한 체제의 정당성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데도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선전은 더 이상 일방적으로 구호를 외치는 방송이 아니다.

상대 사회의 실제 구성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선전 콘텐츠의 일부가 되는 참여형 프로파간다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북한 피해자 제보도 받아라”고 하면?

민주사회에서는 당연히 반박할 것이다.

“좋다. 한국 피해자의 이야기를 방송한다면 북한 주민들의 피해제보도 공개적으로 받아라.”

상식적인 요구다.

그런데 여기서 북한을 우리와 똑같은 토론 규칙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북한은 독립적인 언론이 권력을 자유롭게 검증하고 주민들이 지도자를 공개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민주사회가 아니다.

따라서 극단적으로는 한마디면 끝낼 수도 있다.

“우리 공화국에는 그러한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는 황당하다.

하지만 내부에서 그것을 공개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면 권력 입장에서는 반드시 논리적인 토론에서 상대방을 이겨야 할 필요조차 없다.

그래서 독재체제를 상대하면서 “모순을 지적하면 상대방도 곤란해질 것이다”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상대방이 애초에 같은 토론 규칙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포정치까지 ‘보호’라고 포장한다면?

여기에 한국의 범죄사건을 북한 내부의 통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한다고 생각해보자.

“남쪽에는 자유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보라.”

“범죄가 발생한다.”

“사기가 발생한다.”

“사회갈등이 발생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결론 내린다.

“우리의 통제는 인민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혼란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당연히 거짓 양자택일이다.

자유를 보장한다고 범죄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사회에서도 살인·폭력·사기처럼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은 처벌한다. 정부를 비판할 자유와 다른 사람을 공격할 자유는 전혀 다른 문제다.

하지만 선전은 이런 복잡한 중간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

자유 → 혼란 → 범죄.

이 단순한 이야기만 반복하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역설적으로 북한 내부의 통제와 억압마저 ‘인민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될 수 있다.

생각하다 보니 나치 독일까지 떠올랐다

이런 상상을 계속하다 보니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프로파간다 사례 가운데 하나인 나치 독일까지 생각하게 됐다.

물론 북한과 나치 독일은 역사적 배경도, 이념도, 사회구조도 서로 다르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비교해볼 수 있다.

선전은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치가 세력을 확대하던 당시 독일에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의 충격, 경제위기, 실업과 정치적 혼란 같은 실제 문제가 존재했다.

그러나 나치는 그 복잡한 현실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그리고 유대인 등 특정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아 책임을 돌렸고, 허위정보와 음모론을 결합해 차별과 박해를 정당화했다.

그래서 위험한 선전은 때때로 이런 구조를 가진다.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사실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원인을 설명한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원인만 선택한다.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권력자의 권한 확대와 억압을 정당화한다.

바로 그래서 완전히 황당한 거짓말보다 사실을 재료로 만든 왜곡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생각해보니 축지법보다 이쪽이 훨씬 무섭다

처음에는 그냥 재미있는 역발상이었다.

“내가 김정은이었다면 저런 황당한 선전을 왜 하지?”

그런데 생각을 계속 뒤집다 보니 오히려 섬뜩한 결론에 도달했다.

북한이 정말 선전 방식을 현대화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거짓말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실을 더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

한국 언론의 실제 기사.

한국 피해자의 실제 목소리.

여기에 선택적인 맥락과 정치적 해석을 붙인다.

그리고 김일성 우상화까지 ‘초능력자’에서 ‘미래를 내다본 지도자’로 바꾼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황당한 선전보다 훨씬 상대하기 어려운 형태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지금의 김정은이 우리에게는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나니 나는 오히려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다.

어쩌면 김정은이 지금처럼 낡은 공포정치와 정보통제, 뻔히 알아볼 수 있는 선전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른다.

물론 북한 주민에게 공포정치는 엄청난 비극이다. 그 억압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대한민국이 상대해야 하는 정보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황당한 거짓말은 황당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쉽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우상화 역시 외부세계에서는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그런데 김정은이 어느 날 이런 낡은 방식을 버린다면 어떨까.

한국의 발전상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한국 언론의 실제 보도를 가져온다.

한국에서 실제 피해를 본 사람들의 목소리를 이용한다.

하나하나는 사실인 사건들을 선택적으로 배열한 뒤 북한에 유리한 결론을 붙인다.

내부의 통제마저 ‘인민을 억압하기 위한 통제’가 아니라 ‘남쪽에서 벌어지는 혼란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고 포장한다.

심지어 김일성 우상화에서도 축지법 같은 황당한 신화를 버리고 ‘수십 년 뒤의 미래까지 내다본 지도자’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낸다면?

생각할수록 섬뜩하다.

그래서 조금 우스운 표현이지만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김정은이 나처럼 이런 역발상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무슨 천재적인 선전가라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정반대다.

평범한 사람도 관점을 몇 번 뒤집어보는 것만으로 기존보다 훨씬 교묘한 프로파간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면, 미래의 권위주의 국가가 선전 방식을 현대화할 가능성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포정치는 잔혹하지만 자신의 폭력성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황당한 선전 역시 자신이 선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광고한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권위주의는 어쩌면 사람들이 자신이 선전을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권위주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사고실험을 마치면서 역설적인 안도감까지 느끼게 된다.

김정은이 여전히 낡은 방식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 북한 주민에게는 비극이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이 상대해야 할 선전전이라는 측면에서는 차라리 다행일 수도 있다.

만약 어느 날 북한이 공포와 황당한 거짓말만으로 사람을 통제하는 방법에서 벗어나 실제 사실과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는 훨씬 정교한 선전 체계를 만들어낸다면, 그때의 북한은 지금보다 훨씬 상대하기 까다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처음에는 “내가 김정은이었다면 이렇게 했을 텐데”라는 장난스러운 역발상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끝까지 생각해보고 나니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다행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김정은이 멍청하게 공포통치만 계속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