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보험업계의 이중잣대 , 대납 금지와 수금 압박 사이
[칼럼] 보험업계의 이중잣대, 대납 금지와 수금 압박 사이
형식뿐인 대납 방지 대책
금융감독원의 지시로 보험사들이 ‘보험료 대납 방지 시스템’을 도입했다. 가상계좌 입금자명과 보험설계사(취급자) 명의가 일치하면 영수를 제어한다는 내용이다. 불법 대납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고 하지만, 실효성에는 의문이 든다.
입금자명만 변경하면 얼마든지 우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지인 명의로 입금하면 시스템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진정으로 대납을 방지하려면 가상계좌 발급 권한 자체를 설계사에게서 분리해야 한다. 고객이 직접 콜센터를 통해 본인 명의 계좌를 발급받도록 하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일 것이다.
‘수금 관리 당부’라는 이름의 압박
더 큰 문제는 보험사가 설계사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있다. 월말이 되면 설계사들은 이런 문자를 받는다. “계속보험료 수납마감일로 미입금 계약에 대한 수금관리를 당부드립니다.” 미납 계약 건수와 고객 정보까지 상세히 적시되어 있다.
이는 사실상 설계사에게 보험료 수금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객의 보험료 납부는 고객 본인의 의지와 경제 상황에 달린 문제다. 그럼에도 보험사는 설계사의 수금률과 유지율을 평가 지표로 삼고, 실적이 부진하면 신계약 모집에 제약을 가한다.
결국 설계사는 자신의 평가와 영업 활동을 위해 대납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내몰린다. 한쪽에서는 “대납은 불법”이라 경고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수금 압박으로 사실상 대납을 유도하는 모순적 상황이다.
납입은 쉽게, 해지는 어렵게
시스템의 비대칭성도 눈에 띈다. 보험료 납입을 위한 가상계좌는 설계사가 영업지원 모바일 앱으로 간편하게 발급할 수 있다. 반면 계약 해지는 고객이 모바일로 직접 신청할 수 없고, 반드시 고객센터에 전화해야 한다.
진정 고객 편의를 생각한다면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 보험료 미납 시 보험사가 고객에게 직접 안내 문자를 발송하고, 고객이 콜센터를 통해 본인 명의 가상계좌를 발급받도록 해야 한다. 오히려 해지 절차는 고객이 모바일로 간편하게 접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다. 해지는 번거롭게 만들어 이탈을 막고, 납입은 설계사가 관여할 수 있게 해 수금률을 높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설계사와 고객을 대립시키는 구조
더욱이 고객이 해지를 접수하면 설계사의 모바일에 즉각 알림이 전송된다. “상담 / 정상보험해지접수”라는 메시지와 함께 고객명과 증권번호가 표시된다.
이는 설계사에게 해지 만류 기회를 주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고객 입장에서는 해지 의사를 밝혔는데 설계사에게서 연락이 오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해지는 고객의 정당한 권리인데, 이를 설계사의 실적 관리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고객과 설계사를 불필요한 대립 관계로 내모는 일이다.
침묵하는 현장, 지속되는 모순
놀라운 것은 이런 구조적 문제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는 점이다. 현장의 보험설계사들은 이 모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매달 수금 압박 문자를 받고, 유지율 관리에 시달리며,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대납을 하면서도 대부분 침묵한다.
왜일까? 보험사와의 관계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설계사들이 문제를 제기했다가는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신계약 제어, 수수료 삭감, 심지어 강제 해촉 및 환수 폭탄 같은 불이익이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 결국 부조리를 알면서도 참고 견디는 것이 현장의 생존 방식이 되어버렸다.
언론도 이 문제를 깊이 다루지 않는다. 보험사의 광고와 협찬에 의존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보험업계의 구조적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 금융당국은 형식적 규제만 만들어 ‘뭔가 하고 있다’는 모양새를 갖출 뿐, 현장의 실질적 변화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결국 이 모순적 구조는 고스란히 설계사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된다. 대납이 적발되면 처벌받는 것은 설계사다. 보험사는 “우리는 금지했다”며 면피하고, 당국은 “제도를 만들었다”며 뒷짐을 진다. 정작 설계사를 대납으로 내모는 시스템은 그대로 작동한다.
구조적 모순의 해결이 필요하다
금융당국과 보험사는 입으로는 “불법 대납 근절”을 외친다. 하지만 현장의 설계사들은 수금률과 유지율 압박 속에서 대납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 있다. 형식적 규제만 강화하고, 정작 설계사를 대납으로 내모는 평가 시스템은 그대로 둔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진정한 변화는 시스템의 재설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가상계좌 발급 권한을 고객에게 돌려주고, 보험료 납부 안내를 보험사가 직접 하며, 해지 절차는 고객 중심으로 간소화해야 한다. 설계사의 평가 지표도 단순 수금률이 아닌 고객 만족도와 상담의 질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현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 보험설계사들이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언론과 당국의 자세가 전제되어야 한다.
규제는 형식이 아니라 실질이어야 한다. 현장의 모순을 방치한 채 서류상의 통제만 강화하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책임 회피에 가깝다. 보험업계가 진정 투명하고 공정한 시스템을 원한다면, 이제는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할 때다. 그리고 그 변화는 침묵을 깨는 것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