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호의 시사초점 ] 첫 36 만 원 — 나에게 보험설계사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다
[이건호의 시사초점] 첫 36만 원 — 나에게 보험설계사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다
비장애인에게 직업을 선택하는 일도 때로는 힘들고 어렵다. 그래도 적어도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넓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식당 서빙, 공장이나 건설현장, 배달, 사무직과 서비스직까지—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오랜 시간 공부해 도전해야 하는 전문직까지, 수많은 길이 열려 있다.
하지만 전맹 시각장애인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상품의 위치와 가격을 확인할 수 없어 편의점 일도 어렵고, 테이블과 손님을 직접 확인할 수 없어 서빙도 쉽지 않다. 건설현장은 더 위험하고, 운전이 필요한 일은 애초에 선택지에서 지워진다. 이렇게 하나씩 지우다 보면, 어느 순간 남는 자리가 많지 않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전맹 시각장애인에게 가장 익숙하게 내미는 직업 중 하나가, 바로 안마사다.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이 싫었다
"안마 말고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쪽이 무거워졌다.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그 속에 깊은 체념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마밖에 할 수 없다. 다른 길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니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그 체념에 스며들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안마원에서 근무할 때, 원장에게 안마가 내 적성과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한 적이 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라고 안마 좋아서 하는 거겠냐.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까 하는 거지."
그 한마디가 당시 시각장애인의 직업 현실을 너무 정확하게 담고 있어서, 오히려 서글펐다. 좋아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일.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안마를 할 수 있지만, 안마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안마라는 직업 자체를 낮잡아 보는 것이 아니다. 안마를 좋아하고, 그 일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시각장애인들도 있다. 그들의 선택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건 "시각장애인이니까 안마를 해야 한다"는 전제 그 자체였다. 안마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여야지, 누군가의 운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보험설계사에 도전했다
안마 외의 다른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살아오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길을 안내받고, 일상의 크고 작은 일에서 손을 빌리고, 혼자서는 풀 수 없던 문제를 누군가의 도움으로 넘어섰다. 그런 시간을 지나오며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었다.
보험설계사는 그 바람과 잘 맞닿아 있었다. 보험은 단순히 상품 하나를 파는 일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사고 앞에서 누군가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을 도와줄 수는 없어도, 내가 공부한 금융과 보험 지식으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맞는 보장을 찾도록 도울 수는 있었다. 늘 받기만 하던 사람에서, 조금이라도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그것이 내가 이 일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스스로 선택지를 좁히고 싶지 않았다.
나의 첫 수입은 36만 원이었다
첫 달 수입은 36만 원. 월 4만 5천 원짜리 계약 한 건이 전부였다. 누군가에게는 우스울 만큼 작은 액수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었다. 그 돈은 안마가 아닌 다른 길에서 처음으로 만들어낸 소득이었다. 그것을 손에 쥐던 순간의 벅참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도 안마 말고 다른 일로 돈을 벌 수 있구나.'
36만 원은 나에게 가능성의 증명이었다
그 돈이 내 삶을 크게 바꿔놓지는 못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증명해줬다. 시각장애인도 안마가 아닌 길에서 소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누군가가 대신 말해준 게 아니었다. 내가 직접 공부하고, 시험을 치르고, 자격을 얻고, 고객과 마주 앉아 계약을 맺고, 그 결과로 얻어낸 소득이었다. 그래서 36만 원은 나에게 그냥 수입이 아니라, 내 앞에 놓인 선택지가 하나 더 늘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가입해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내가 전맹이라는 걸 알고 "이 사람을 한번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입해주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장애라는 특수성 때문에, 지인들에게 부탁해도 나쁘게 볼 사람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살아보려는데 한번 도와주자"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되도록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한다. 장애를 이유로 부탁하고 싶지 않아서다. 보험설계사라면 장애와 무관하게 고객에게 필요한 보장을 설명하고, 그 설명을 들은 사람이 스스로 판단해 계약을 결정하는 것—그게 가장 떳떳한 모습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실적이 거의 없어도 생계를 보험 하나에 걸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기업체 헬스키퍼로 일하며 세전 약 125만 원을 받는다. 안마와 보험설계사를 함께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마가 가장 좋아서가 아니라, 실적 없는 달에도 생활을 지탱할 최소한의 기반이 필요해서다. 만약 보험설계사 하나에 생계 전부가 달려 있다면, 실적이 부족한 달마다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지인에게 연락하고, 친구에게 부탁하고, 필요 없는 사람에게까지 가입을 권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헬스키퍼로 최소한의 압박을 내려놓고, 정말 보험이 필요한 사람이 찾아왔을 때 제대로 마주 앉아 상담하고 싶었다. 실적은 많지 않다. 계약 없는 달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누구에게도 억지로 부탁하지 않으며, 내가 정한 방식으로 이 일을 이어가고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나에게 가입해주는 사람들은 특별하다
수십만 명의 설계사가 있고, 그중 비장애인 설계사만 해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도 그 많은 이들 가운데 나를 선택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늘 뭉클하다.
그 사람은 나에게 단순히 "계약 하나 해준 고객"이 아니다.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나를 골라준 사람이다. 물론 고객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필요한 보험을 고른 것뿐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선택을 결코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내가 전맹이라는 걸 알고도 상담을 맡겨준 사람, 내 설명을 믿고 계약을 결정해준 사람—그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동정과 선택은 다르다
나는 동정받고 싶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 상황을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나를 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내가 먼저 "시각장애인이니 하나 가입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것과, 고객이 "이 설계사에게 상담받고 싶다"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는 장애를 앞세워 계약을 만들고 싶지 않다. 내가 가진 전문성으로 설명하고, 고객이 자신의 판단으로 나를 선택해주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가장 떳떳한 보험설계사의 모습이다.
실적 없는 달이 많아도 괜찮은 이유
솔직히 지금도 실적 없는 달이 훨씬 많다. 계약이 하나도 없는 달도 있다. 그래도 억지로 만들고 싶지 않고, 지인에게 계속 연락해 부탁하고 싶지도 않다. 이번 달이 부족하다고 필요 없는 보험을 권하고 싶지도 않다. 계약이 없더라도, 정당한 방식으로 이 일을 지켜가는 것이 나에게는 훨씬 중요하다.
나에게 보험설계사는 '돈' 이상의 의미다
이 일은 단순한 수입원이 아니다. 가능성이고, 도전이고, 자부심이고, 선택권이다. 무엇보다 "안마가 아니어도 나는 소득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경험하게 해준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직업을 그저 '좋아한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다.
다른 직업을 갖게 되어도, 이 이름만은 놓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나는 다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안정적인 근로소득을 주는 직업을 찾을 수도, 새로운 자격증으로 다른 분야에 도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험설계사라는 이름은 쉽게 내려놓지 못할 것 같다. 설령 1년 내내 계약이 없어도 말이다. 이 일은 내가 처음으로 다른 길을 통해 소득을 만들어본 경험이자, 안마 외에도 걸어갈 길이 있다는 걸 알려준 이름이기 때문이다.
전맹 시각장애인에게 필요한 건 '안마 하나'가 아니다
안마라는 직업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일을 사랑하고 자신의 길로 선택한 이들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다만 안마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여야지, 정해진 운명이어서는 안 된다. 보험설계사도, 신용상담사도, 금융상담도, 사무직도, IT 분야도—전맹이라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문이 닫혀서는 안 된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고를 기회'다
"이 일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주는 것과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라고 물어주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나는 후자가 진짜 직업 선택권이라고 믿는다. 나는 안마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내 적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역시,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첫 36만 원을 나는 잊지 못한다
월 4만 5천 원짜리 계약 한 건, 첫 수입 36만 원. 누군가에게는 작은 돈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돈이었다. 안마가 아닌 길에서 처음으로 얻은 소득이었고, "나도 다른 길을 갈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증거였다. 그래서 나는 그 첫 36만 원과, 그 돈을 벌게 해준 이 직업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다.
앞으로도 나는 다른 일에 도전할 것이다.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보험설계사만은 계속하고 싶다. 계약이 없는 달이 이어져도, 설령 1년 내내 수입이 없어도, 나는 이 이름을 쉽게 놓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은 나에게 안마 밖에도 살아갈 길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보여준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나를 선택해준 고객들 역시, 나에게는 그저 스쳐 가는 고객이 아니다. 수십만 명의 설계사 가운데, 그 많은 비장애인 설계사들 사이에서 나를 골라준 사람들. 그 선택을 나는 절대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동정받고 싶지 않다. 장애를 내세워 보험을 팔고 싶지도 않다. 다만 필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그 설명을 들은 고객이 스스로 판단해 나를 선택해주는 것—나는 그것이 가장 떳떳한 보험설계사의 모습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언젠가 다른 직업을 갖게 되더라도, 보험설계사라는 이름만큼은 계속 지니고 싶다. 설령 1년 내내 계약이 없어도. 나에게 이 일은,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정말 특별하고 소중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첫 36만 원. 누군가에게는 작은 돈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직업의 선택지가 하나 더 생겼음을 증명해준 소중한 돈이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을 함께해준 고객들 역시, 내 인생에서 쉽게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나를 선택해줘서, 진심으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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