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말을 못 한다고 행복도 모를까? 제러미 벤담이 장애인 복지 현장에 던지는 질문
최근 스레드에서 무척이나 씁쓸하면서도 동시에 깊은 탄식을 자아내는 글을 하나 읽었다. 요지는 이러했다. 장애인 복지관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자문을 해주는 한 전문가가, 어느 자문회의에서 복지관 직원으로부터 귀를 의심케 하는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장애인 복지관에 오는 초등학생들)도 행복을 느낄까요?"
자신이 돌보고 지원해야 할 대상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조차 의심하는, 아니 어쩌면 그들이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없을 것이라 지레짐작하는 오만이 깔린 질문이었다. 글쓴이는 너무 기가 막혀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며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은 행복을 느끼는가? 당신이 느끼는 걸 왜 아이들은 못 느낄 거라 생각하는가? 표현을 잘 못한다고 느끼는 것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면 대단한 착각이다."
분노가 서린 글쓴이의 답변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통쾌했다. 타인의 마음을 얕잡아본 무례함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일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어 내려가며 내심 작은 아쉬움이 피어올랐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혹은 순간의 화를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의 좁은 시야를 철학의 거울 앞에 마주 서게 했다면 어땠을까. 핏대를 세우며 화를 내기보다는, 수백 년 전 세상을 뒤흔들었던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철학적 비유를 들려주며 그 직원의 뼈를 때려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저 복지관 직원의 얕은 생각은 17세기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시대착오적 오만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동물에게 영혼이나 이성이 없다고 믿었다. 그에게 동물은 그저 정교하게 조립된 '자동 기계(Automata)'에 불과했다. 동물이 매를 맞고 비명을 지르는 것은 고통을 느껴서가 아니라, 기계의 부품이 삐걱거리며 마찰음을 내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즉, '이성적인 사고'와 '언어적 표현 능력'이 없는 존재는 내면의 감각마저 없을 것이라는 지독한 착각이었다.
스레드 글에 등장한 직원의 시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이들이 비장애인처럼 논리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지 못하고, 보편적인 속도와 방식으로 행복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내면의 감정마저 부재할 것'이라 치부해 버린 것이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출력(Output)이 서툴다고 해서 내면의 입력(Input)과 감각마저 고장 났을 것이라 단정 짓는 폭력적인 시선이다.
그리고 이 견고한 오만의 틀을 완벽하게 박살 내며 등장한 인물이 바로 공리주의의 창시자 제러미 벤담이다. 그는 타인(혹은 타 생명체)을 존중해야 하는 근본적인 기준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벤담이 남긴 이 유명한 통찰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생명 윤리와 인권의 든든한 토대가 되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이성을 가지고 있는가?(Can they reason?)'도 아니고, '그들이 말을 할 수 있는가?(Can they talk?)'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Can they suffer?)'이다."
벤담의 이 말은 지능의 높고 낮음이나 언어의 유창함이 결코 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 척도가 될 수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고통을 느끼고, 반대로 따뜻함과 행복을 감각할 수 있는 생명이라면 그 자체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과학적 증거와 일상의 경험을 통해 인간보다 지능이 훨씬 낮은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조차 주인의 사랑에 기뻐하고, 학대에 고통스러워하며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동물들조차 이토록 섬세한 감정을 느낀다면, 하물며 아무리 중증의 지적 장애나 자폐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층위는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복잡할 것이다.
인지 능력이 보편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신경학적 발달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의 내면이 텅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표현 방식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 뿐, 그 안에서는 기쁨과 슬픔, 불안과 안정감, 환희와 상처가 우리와 똑같은 무게로 요동치고 있다. 동물조차 느끼는 그 보편적인 생명의 감각을, 같은 인간인 장애 아동들이 느끼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것은 지독한 모순이자 오만이다.
만약 그 자문회의에서 직원의 황당한 질문을 받았을 때, "네가 느끼는 걸 왜 애들은 못 느낄 거라 생각하냐!"라는 감정적인 질타 대신 벤담의 이야기를 꺼냈다면 어땠을까.
"선생님, 예전 유럽 사람들은 동물이 말을 못 하니 고통도 못 느끼는 기계라고 생각했대요. 하지만 제러미 벤담이라는 철학자가 이렇게 말했죠. 이성이 있는지, 말을 잘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고통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인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강아지나 고양이도 주인이 쓰다듬어주면 행복해하고 혼내면 슬퍼하잖아요. 아무리 지적 장애가 심하고 자폐 성향이 강한 아이들이라도 동물보다 지능이 낮지는 않죠. 당연히 동물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깊은 감정을 느낍니다. 우리 아이들이 선생님처럼 유창하게 말을 하거나 세련되게 감정을 포장하지 못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맛있는 것을 먹을 때의 달콤함, 다정한 손길이 닿을 때의 따뜻함, 누군가 자신을 무시할 때의 서늘함은 우리와 똑같이, 아니 어쩌면 더 예민하게 피부로 느끼고 있을 겁니다. 행복을 느끼는 데에는 높은 지능이나 화려한 어휘력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요."
이렇게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비유를 들어 대답해 주었다면, 그 직원의 얼굴을 훨씬 더 화끈거리게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단순한 분노의 표출을 넘어, 상대방이 자신의 무지가 얼마나 부끄럽고 폭력적인 편견이었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서늘한 자각의 순간을 선물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종종 '표현의 유창함'을 '감정의 깊이'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하지만 행복과 슬픔, 고통과 위안은 지능의 산물이 아니라 생명의 증거다.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하고, 타인의 행복을 함부로 의심하는 사회는 결코 성숙할 수 없다. 스레드에서 본 그 직원의 어리석은 질문이 단순히 한 개인의 무지를 넘어, 효율성과 논리적 표현력만으로 사람의 가치를 줄 세우려는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진다.
오늘 하루,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이 말로 다 전하지 못하는 내면의 감각들에 조금 더 다정한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벤담이 남긴 그 묵직한 질문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의 공감 능력을 시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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