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은 위험에 대비하는 상품이다. 그런데 한국의 보험 시장을 들여다보면, 보험회사들이 가입자에게 ‘병을 관리하지 말고 키우라’고 부추기는 것처럼 보이는 기묘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단계별 보장의 함정
메리츠화재의 ‘더 건강한 보장보험 5.10.5’를 예로 들어보자. 이 상품에는 이른바 ‘고고당(고혈압·고지혈증·당뇨병) 특약’이 있다. 당뇨병의 경우 당화혈색소 수치에 따라 단계별로 보험금을 지급한다. 7% 이상이면 200만원, 9% 이상이면 500만원, 11% 이상이면 500만원. 고혈압과 고지혈증도 마찬가지다. 경증·중등증·중증으로 나누어 각각 50만원, 100만원, 200만원을 지급한다.
언뜻 보면 합리적인 구조 같다. 병의 심각도에 따라 보상을 차등 지급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선택권 없는 ‘필수’ 특약
실제 의학적으로 당화혈색소 11%까지 올라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당뇨 환자는 7~9% 수준에서 관리되며, 11%는 사실상 합병증 고위험군에 진입한 상태다. 그렇다면 가입자 입장에서 “11% 특약은 빼고 설계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보험사의 답변은 명확하다. “인수품외 자율조정 메시지”가 뜬다. 다시 말해, 당화혈색소 11% 특약과 고혈압 중증 특약은 필수 선택 사항이라는 것이다. 원하지 않아도 가입해야 한다. 아니면 상품 자체를 포기하든가.
왜곡된 인센티브 구조
이런 구조가 만들어내는 결과는 무엇일까? 가입자는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특약에 매달 보험료를 납입하게 된다. 10년납이든 20년납이든, 그 금액은 결코 작지 않다. 당화혈색소 7%, 9%, 11% 세 단계 특약에 드는 보험료만 월 19,220원. 20년이면 461만원이다.
여기서 심리적 왜곡이 발생한다. “이미 수백만원을 낸 보험료, 어떻게든 본전은 찾아야 하지 않을까?” 당화혈색소 7%에서 관리하면 200만원, 9%까지 올라가면 500만원, 11%까지 가면 총 1,200만원. 병을 관리하지 않고 악화시킬수록 받는 보험금은 늘어난다.
물론 아무도 일부러 병을 키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보험 들었으니 병원 가는 거 조금 미루자”는 생각, “약을 꼬박꼬박 먹는 것보다 조금 방치해서 다음 단계 진단을 받으면 보험금이 더 나오는데”라는 유혹은 분명 존재한다.
보험사의 변명: 손해율 관리?
보험사는 이런 구조를 “상품 설계의 묘”라고 포장할지 모른다. 혹은 “손해율 관리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가입자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단계를 나누지 말고 당화혈색소 9% 이상 진단 시 700만원 일시 지급 같은 단순한 구조로 설계할 수도 있다. 고혈압과 고지혈증도 마찬가지다. 굳이 경증·중등증·중증으로 나누어 가입자가 “다음 단계”를 기대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
보험의 본질을 잃다
보험은 본래 위험을 분산하고 예측 불가능한 손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제도다. 그런데 한국의 보험 시장은 어느새 “병을 키워야 이득”인 기묘한 게임 구조로 변질되었다. 보험사는 불필요한 특약을 끼워팔아 수익을 극대화하고, 가입자는 납입한 보험료가 아까워 병을 방치하는 유인을 받는다.
이것이 과연 건강보험의 올바른 방향인가? 보험사는 이제 묻고 답해야 한다. 당신들은 고객의 건강을 지키려는 것인가, 아니면 병을 팔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