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의 시사초점] 사기 피해자가 왜 빚까지 갚아야 하나 — ‘피해자 전액 면책제도’를 도입하자
얼마 전 스레드에서 한 사기 피해자의 글을 읽었다.
전남친이 피해자의 동의 없이 휴대전화를 가져가 금융 앱에 접속해 대출을 받았고, 사채를 숨긴 채 자살하겠다는 말까지 하면서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압박해 돈을 빌렸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피해자는 차용증까지 작성했지만, 자신 외에도 여러 피해자가 존재하고 가해자가 사채를 돌려막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며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피해자는 결국 형사·민사 절차까지 준비하게 됐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또 하나의 문제를 생각하게 됐다.
만약 피해자가 가해자 때문에 대출을 받아 돈을 마련했다면, 그 대출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현재의 금융 시스템에서는 결국 대출 명의자인 피해자가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범죄 때문에 생긴 빚까지 피해자가 갚아야 하는가
사기를 당한 사람은 이미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범죄자가 피해자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거나, 피해자를 속여 대출을 받아 돈을 건네게 만들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피해자는 돈을 잃은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대출 원금, 이자, 연체료, 신용점수 하락까지 떠안게 될 수 있다.
범죄 때문에 발생한 경제적 피해가 금융생활 전체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채무 문제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범죄 피해로 발생한 채무는 일반적인 채무와 다르게 다뤄야 한다.
신용회복위원회에 ‘피해자 특별면책’을 만들자
그래서 나는 신용회복위원회 채무조정 제도에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으면 한다.
이름을 붙이자면,
‘범죄피해자 특별면책제도’다.
사기, 명의도용, 불법 대출 등 명백한 범죄행위로 인해 본인에게 채무가 발생했고 그 사실이 수사기관이나 법원의 자료 등을 통해 확인된다면,
해당 범죄로 발생한 채무를 전액 면책해주는 것이다.
단순히 원금 일부를 깎아주는 수준이 아니다.
원금 100% 면책.
해당 채무에서 발생한 이자도 면책.
연체로 발생한 불이익도 회복.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신용점수도 원래대로 돌려놓자
범죄 피해 때문에 신용점수가 떨어진 사람에게
“채무조정 받았으니 앞으로 몇 년 동안 신용점수가 낮은 상태로 살아가세요.”
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본인이 돈을 흥청망청 써서 빚을 만든 것도 아니다.
도박으로 빚을 만든 것도 아니다.
사치를 하다가 빚을 만든 것도 아니다.
범죄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범죄 때문에 떨어진 신용점수 역시 범죄 피해 이전 수준으로 원상회복해줘야 한다.
채무가 전액 면책됐는데도 신용정보에는 과거 연체와 채무조정 기록이 남아 금융생활에 계속 불이익을 준다면 완전한 피해 회복이라고 할 수 없다.
피해자가 ‘신용불량자’가 되는 이상한 구조
생각해보자.
A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속여 돈을 빼앗았다.
A는 범죄자다.
그런데 피해자인 B가 대출을 받아 A에게 돈을 건넸다면,
B의 신용점수가 떨어질 수 있다.
B가 연체하면 금융기관은 B를 위험한 채무자로 평가한다.
결국 범죄를 저지른 사람 때문에 죄 없는 피해자의 금융생활이 망가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반드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범죄자가 피해자의 돈을 빼앗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피해자의 신용까지 빼앗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 특별면책’은 이렇게 운영하면 된다
물론 아무나 “나는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한다고 채무를 없애줘서는 안 된다.
엄격한 심사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 형사사건 수사자료
* 법원의 판결문
* 계좌이체 내역
* 문자·카카오톡 등 객관적인 증거
* 대출 실행 및 자금 이동 내역
* 피해자 진술
* 가해자의 자백이나 관련 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확인하면 된다.
그리고 범죄와 채무 사이의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확인된 경우에만 특별면책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악용 가능성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
피해 회복의 첫 번째 단계는 ‘빚을 없애주는 것’
사기 피해자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네가 진 빚이 아니다”라고 국가가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범죄 때문에 발생한 채무라면,
“당신은 피해자입니다.”
라고 인정하고,
“그러므로 그 범죄 때문에 발생한 채무까지 당신이 평생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라고 말해줘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피해자 보호다.
가해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면 된다
그렇다면 “그 돈은 누가 갚느냐?”라는 문제가 생길 것이다.
나는 국가와 금융기관이 피해자의 채무를 정리한 뒤, 범죄자에 대한 구상권 및 범죄수익 환수를 강화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가해자가 재산을 숨겼다면 추적하고,
범죄수익이 있다면 환수하고,
재산을 은닉했다면 법에 따라 책임을 묻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해자에게 받아내는 과정 때문에 피해자의 인생까지 같이 망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먼저 구제하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한다.
피해자가 다시 정상적인 금융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전액 면책만으로 끝내서도 안 된다.
범죄 때문에 하락한 신용점수는 회복시키고,
부정적인 신용정보 등록도 정정하고,
필요하다면 일정 기간 금융기관이 피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도록 별도의 보호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래서 피해자가 다시 정상적으로
휴대전화 할부를 하고,
신용카드를 만들고,
전세대출이나 주택대출을 알아보고,
사업자금이나 생활자금을 금융기관에서 빌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범죄 피해 때문에 금융사회에서 퇴출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제 채무조정의 관점을 바꾸자
현재의 채무조정은 기본적으로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러나 범죄 피해자에게 필요한 질문은 다르다.
“왜 이 사람이 이 빚을 지게 되었는가?”
이것부터 봐야 한다.
스스로 경제적 판단을 잘못해서 생긴 채무와,
타인의 범죄 때문에 억울하게 발생한 채무를
똑같은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전자는 채무조정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피해자 구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나는 ‘범죄피해자 전액 면책’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신용회복위원회에 이런 제도를 도입했으면 한다.
범죄로 인해 발생한 채무임이 객관적으로 확인된 경우, 피해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포함한 전액 면책을 제공하자.
그리고,
범죄 때문에 하락한 신용점수도 피해 발생 이전 수준으로 원상회복시키자.
피해자에게 “몇 년 동안 신용을 회복하세요”라고 요구하지 말자.
피해자는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다.
돈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대출까지 떠안고,
이자까지 내고,
연체까지 겪고,
신용점수까지 떨어지고,
몇 년 동안 금융생활의 불이익까지 감수해야 한다면
그것은 피해자에게 두 번, 세 번 책임을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범죄자는 자신의 범죄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피해자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의 경제적 책임까지 짊어져서는 안 된다.
범죄 때문에 생긴 빚은 피해자의 빚이 아니다.
이제 대한민국의 채무조정 제도도 이 원칙에서 출발했으면 한다.
가해자의 책임은 더 강하게.
피해자의 부담은 더 작게.
그리고 피해자의 신용은 범죄 이전으로.
나는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피해자 중심 금융복지’라고 생각한다.
신용회복위원회에 ‘범죄피해자 특별면책제도’를 도입하자.
억울하게 생긴 채무는 전액 면책하고, 무너진 신용점수도 원상회복하자.
피해자가 가해자의 범죄 때문에 자신의 인생까지 다시 갚아나가야 하는 사회는 이제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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