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 칼럼] <백학벌의 새봄> 작가의 위대한 항명: 그가 겨눈 진짜 과녁은 '평양 수뇌부'였다
글 : 이건호 (금융전략가, IIC / IRC 창시자)
독재 국가의 선전물은 필연적으로 지루하다. 체제의 우월성을 찬양하고 최고 존엄의 위대함을 억지로 주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숨 막히는 검열의 틈바구니 속에서, 기어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독재자의 심장부에 날카로운 독침을 꽂아 넣은 천재가 있다.
작년 방영된 북한 드라마 <백학벌의 새봄> 14화에 등장한 몇 마디의 대사는 단순한 텔레비전 연속극의 대본이 아니다. 이것은 작가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평양 수뇌부, 더 나아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정조준하여 쏘아 올린 가장 완벽하고 위대한 '블랙코미디'이자 '항명'이다.
1. "대혼란"의 주체는 누구인가: 검열을 농락한 천재적 은유
극 중 주인공 미래는 부패한 간부들의 행태에 분노하며 "겉 희고 속 검은 자들 가려내는 기계"의 도입을 갈망한다. 이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예리하다. "그런 게 발명되면 지구에 대혼란이 일어날 거다."
이 대사가 당의 검열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표면적으로 하급 간부나 일선 농장의 게으른 책임자들을 비판하는 ‘안전한 장치’로 위장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가 진정으로 의도한 바는 전혀 다르다.
북한 체제에서 가장 겉 다르고 속이 다른, 즉 '입으로는 인민을 위한다면서 뒤로는 인민의 피를 빠는' 가장 거대한 흑막이 누구인가? 바로 김정은 일가와 평양의 핵심 권력층이다. 아버지가 말한 '지구의 대혼란'은 곧 '이 기계가 평양에 놓이는 순간, 너희들의 추악한 위선이 까발려지고 북한 체제는 붕괴할 것'이라는 작가의 서늘한 경고다. 검열관들의 무지함을 역이용해 최고 존엄의 위선을 조롱한 이 은유는 가히 천재적이다.
2. "책임비서는 책임지는 자리": 기득권을 향한 조롱의 절정
작가의 천재성은 극 중에 등장하는 뼈 있는 농담에서 정점을 찍는다. 문제의 책임을 하부로 떠넘기기 바쁜 당 간부들을 향해 극 중 인물은 일갈한다. "책임비서는 책임지는 자리라서 책임비서다."
북한에서 당의 핵심 권력인 '비서' 직함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상징한다. 그들은 지시하고 군림할 뿐, 결코 책임지지 않는다. 농사가 망하면 기후 탓을 하거나 일선 농민들을 사상 투쟁으로 내몰아 숙청할 뿐이다.
작가는 이 짧은 언어유희를 통해, 권리만 탐하고 의무는 팽개친 수뇌부의 뻔뻔함을 조롱했다. "너희들의 직함에 붙은 그 '책임'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기만적인지 인민들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국에 송출되는 전파를 통해 당당하게 선포한 것이다.
3. 천재 작가가 인민에게 남기고자 했던 진짜 메시지
그렇다면 작가가 <백학벌의 새봄>을 통해 인민들에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속지 말라"는 처절한 외침이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구호를 외치며 당에 충성할 것을 강요하지만, 그들의 속내를 판독기로 들여다보면 오직 자신들의 배를 불리려는 탐욕뿐이라는 진실. 드라마 속 미래가 "속이 다 후련해지도록 된 매를 안겨주고 싶다"고 분노한 대상은, 화면 밖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 인민들이 진짜로 몽둥이를 들어 쳐부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
4. 펜으로 독재를 타격한 진짜 사령관
총칼로 세워진 권력은 작은 진실의 파편 앞에서도 쉽게 흔들린다. <백학벌의 새봄>을 집필한 이 이름 모를 작가는, 체제의 가장 강력한 선전 도구인 국영 방송을 역이용해 2천5백만 인민의 가슴속에 '의심'이라는 가장 위험한 불씨를 던져 넣었다.
억압의 시대일수록 예술은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된다. 김정은의 심장부에 합법적인 폭탄을 투하한 이 천재 작가의 용기와 통찰에 웅장한 박수를 보낸다. 그는 이미 펜 하나로 평양 수뇌부를 타격한 진정한 혁명가다.